서쪽에 세워진 비운의 궁궐 경희궁의 역사는 조선 왕실의 흥망과 정치적 격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경희궁은 왕이 거처하고 정사를 펼친 공간이면서 동시에 반복된 훼손과 복원의 역사를 겪은 궁궐이다.
서쪽에 세워진 비운의 궁궐 경희궁의 역사를 통해 궁궐 건축과 조선 정치사의 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이어진 창건의 배경
경희궁은 처음부터 계획된 정궁이 아니라 정치적 상황과 풍수 인식 속에서 형성된 궁궐이었다. 이 궁궐의 터는 원래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 왕실과 깊은 연관을 지닌 공간이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기존 궁궐로의 입궁을 꺼려하며 새로운 궁궐을 조성하고자 했다. 그는 인왕산 아래 새로운 궁궐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이 터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풍수적 해석을 받아들였고 그 기운을 왕실이 흡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인식 아래 원종의 사저는 철거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궁궐이 세워졌다. 이 궁궐은 처음에는 경덕궁이라 불렸으며 이는 경사를 기리고 덕을 기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인해 곧 폐위되었고 자신이 건설한 궁궐을 직접 사용하지는 못했다. 이후 인조가 즉위한 뒤 기존 궁궐들이 화재와 반란으로 소실되면서 이 궁궐은 임시 거처이자 중요한 왕실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곳에서는 여러 왕이 탄생하고 즉위했으며 또한 여러 왕이 생을 마감했다. 이는 경희궁이 단순한 보조 궁궐이 아니라 조선 왕실의 중심 무대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1760년에 이르러 궁궐의 명칭은 경희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는 기존 이름이 왕실 시호와 음이 같다는 이유 때문이었으며 이름 변경을 통해 왕실의 예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 이처럼 경희궁의 시작은 정치 권력과 풍수 신앙 그리고 왕실 예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2. 서궐로 불린 궁궐의 역할과 구조적 특징
경희궁은 경복궁의 서쪽에 위치한 까닭에 서궐로 불렸다. 이 궁궐은 정궁과는 다른 성격을 지니면서도 조선 후기 정치와 왕실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숙종 영조 순조 등 여러 왕이 이곳을 거처로 삼았으며 왕의 탄생과 승하가 반복된 공간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경희궁이 단순한 별궁이 아니라 실질적인 궁궐 기능을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경희궁의 공간 구성은 다른 궁궐과 비교해 매우 독특하다. 정전 영역과 침전 영역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정문 또한 궁궐의 정남쪽이 아닌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로 인해 궁궐에 들어서는 동선은 침전 영역을 먼저 지나 정전으로 향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정전이 침전 뒤에 위치하는 경복궁의 배치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정전인 숭정전은 경사지에 축대를 조성한 뒤 그 위에 세워졌으며 이중 월대를 갖춘 위엄 있는 건물이었다. 숭정전 주변에는 행각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 뒤쪽에는 후전인 자정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배치는 왕의 공식 행위와 사적인 공간을 단계적으로 구분하는 조선 궁궐 건축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 경희궁에는 이 외에도 침전과 누정 그리고 다양한 부속 전각들이 조성되어 하나의 독립된 궁궐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 궁궐은 조선 후기 궁궐 건축의 실험성과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였다.
3. 훼손과 이전 그리고 복원의 현대사
경희궁의 비극적인 역사는 조선 말기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경희궁은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급격한 훼손을 겪게 되었다. 일제는 궁궐 서쪽에 일본인 학교를 세우면서 다수의 전각을 철거하거나 다른 장소로 이전시켰다. 궁궐은 체계적으로 해체되었고 원래의 공간 질서는 크게 무너졌다.
정전이었던 숭정전은 남산 기슭으로 옮겨져 불교 사찰의 본전으로 사용되었고 이후에는 대학 법당으로 활용되었다. 흥정당과 관사대 등 주요 건물들도 각각 사찰이나 활터 등으로 이전되었다. 궁궐의 정문이었던 흥화문 역시 여러 차례 자리를 옮기며 본래의 위상을 잃었다. 이러한 이전과 변형은 궁궐이라는 공간이 지닌 역사적 맥락을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광복 이후에도 경희궁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궁궐 터는 학교 부지로 활용되었고 이후 민간 기업에 매각되었다가 다시 공공 자산으로 환수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궁궐의 원형을 보존하려는 노력보다는 개발 논리가 우선시되었다. 궁궐 입구에는 대형 박물관이 들어서면서 또 한 번 공간의 연속성이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전각은 자료 조사와 고증을 거쳐 복원되었다. 숭정전과 흥화문 그리고 태녕전 등은 비교적 최근에 재건되며 경희궁의 윤곽을 다시 드러내고 있다. 현재의 경희궁은 완전한 복원이라기보다는 상처 입은 역사를 보여주는 현장에 가깝다. 경희궁은 조선 궁궐의 건축적 가치뿐 아니라 식민지 시기와 근현대 도시 개발 속에서 문화유산이 어떻게 훼손되고 재해석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