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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에서 장군이 되기까지 홍범도의 길입니다.

by 하루메모 2026. 1. 20.

 


일제강점기 무장투쟁의 최전선에서 봉오동과 청산리의 승리를 이끈

포수에서 장군이 되기까지의 홍범도의 길을 정리 했습니다.
홍범도가 어떤 선택으로 군인이자 독립운동가가 되었는지 흐름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포수에서 장군이 되기까지 홍범도의 길입니다.

 

 

 

 

1. 첫째 의병에서 시작된 분노와 산포대의 결단입니다


홍범도는 평안북도 양덕에서 태어나 사냥과 포수 생활을 하며 산과 들을 익숙하게 다루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군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대는 그를 평범한 삶에 머물게 하지 않았습니다. 1907년 전국적으로 의병봉기가 일어나고 일제는 무장투쟁을 약화시키기 위해 총포를 회수하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였습니다. 포수들의 총은 생계의 도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었고 산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술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총을 빼앗긴다는 것은 단순한 단속이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를 부정당하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홍범도는 그 현실에 분노했고 분노는 곧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산포대를 조직해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산포대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산과 지형을 아는 포수들의 장점이 그대로 전투력으로 바뀌는 방식이었습니다. 홍범도는 후치령을 중심으로 갑산 삼수 혜산 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일본 수비대를 격파했습니다. 이 시기의 전투는 정규군의 전면전과 달랐습니다. 숫자와 장비에서 밀리는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길을 알고 시간을 알고 상대의 빈틈을 읽는 감각이 필요했습니다. 홍범도는 그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산을 이동로로 삼았고 숲과 능선을 방패로 삼았으며 한 번에 끝내기보다 계속 괴롭히고 끊어내는 방식으로 싸웠습니다. 이 전투 방식은 이후 독립군 활동의 중요한 자산이 됩니다.

1910년 그는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간도로 건너가 포수단을 조직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홍범도가 단지 싸우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교포들에게 광복사상을 고취하고 국내와 연락하며 애국지사를 모으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무장투쟁은 총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모으고 교육하고 조직을 유지할 생활 기반과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홍범도는 산에서 싸우는 기술과 함께 사람을 묶는 실무를 동시에 해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포수이자 의병이라는 개인의 범위를 넘어 조직을 만들어내는 지도자의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이 시기를 지나며 홍범도의 이름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께 붙습니다. 하나는 현장에서 싸우는 유격전의 상징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근거지에서 독립군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 조직가의 상징입니다. 이런 축적이 있었기에 이후 봉오동과 청산리 같은 큰 승리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독립운동은 어느 날 갑자기 위대한 전투가 벌어져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오래 버티며 사람과 기술을 쌓아 올린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홍범도의 시작은 바로 그 축적의 시간에 있었습니다.

 

 

 

 

2.  대한독립군의 창설과 봉오동 청산리의 승리입니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무장투쟁의 흐름은 더 넓게 확장되었습니다. 홍범도는 1919년 3월부터 6월 사이 대한독립군을 창설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부대 결성이 아니라 동만주 일대에서 흩어져 있던 저항의 힘을 하나의 이름과 체계로 세우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는 같은 해 8월 200명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혜산진과 갑산 등지의 일본군을 습격해 큰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국경을 넘나드는 작전은 위험했지만, 일본군의 허를 찌르고 독립군의 존재를 알리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전과는 자신감이 되었고 자신감은 더 큰 작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후 그는 정예부대를 인솔해 압록강을 건너 강계 만포진을 습격했고 자성에서 여러 날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성과는 단지 전투의 승패를 넘어 독립군이 정규군을 상대로도 싸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당시 독립운동 진영에 가장 절실했던 것은 희망의 근거였습니다. 이길 수 있다는 근거가 없으면 사람들은 흩어지고 조직은 무너집니다. 홍범도의 연속된 작전은 그 근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1920년에는 간도대한국민회와 합작해 군사조직을 구성했고 홍범도는 제1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조직이 개편되며 북로사령부로 불리기도 했고, 최진동이 이끄는 도독부와 통합하는 과정도 거쳤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통합과 개편이 반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독립군은 늘 자금과 무기와 인력에서 부족했고, 일본군의 추격과 탄압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힘을 합쳐야 했습니다. 홍범도는 이런 통합의 과정에서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확대 개편된 병력으로 국내 진입작전을 추진했습니다.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벌어진 전투는 홍범도에게 가장 상징적인 승리로 남습니다.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대부대를 크게 격파했고, 이 승리는 항일무장투쟁의 흐름을 단숨에 끌어올렸습니다. 봉오동의 승리는 우연이 아니라 지형을 읽는 능력과 유격전의 경험, 그리고 합작과 통합을 통해 확보한 전력이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홍범도는 산과 계곡의 구조를 활용하는 데 강했고, 일본군을 유리한 자리로 끌어들이는 방식에 능했습니다. 일본군의 장비와 조직력이 강할수록, 독립군은 장소와 시간의 선택으로 그 힘을 무력화해야 했습니다. 봉오동은 그 전략이 현실에서 통했다는 증명이었습니다.

같은 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도 홍범도는 독립군의 주요 지휘관으로 참가해 김좌진 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청산리는 한 번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고 여러 차례의 전투가 이어진 큰 전투였습니다. 홍범도는 그 전투 속에서 부대를 지휘하며 독립군의 전력을 유지하고 일본군의 공세를 막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의 승리는 독립군이 단순한 저항 집단이 아니라 군사적 역량을 갖춘 세력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홍범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승리 뒤에는 더 거센 추격이 뒤따랐습니다. 일본군은 패배의 치욕을 씻기 위해 집요하게 추격했고 독립군은 생존을 위해 조직을 재정비해야 했습니다. 홍범도는 대한독립군단을 구성하는 흐름 속에서 부총재로 선임되어 독립군의 큰 틀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전투의 영광만큼이나, 그 뒤에 남은 과제는 더 무거웠습니다. 살아남아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홍범도의 중간 시기는 승리와 책임이 동시에 쌓여가는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자유시참변 이후 강제이주와 끝까지 남은 이름입니다

봉오동과 청산리의 승리 이후 독립군은 계속되는 추격을 피하고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노령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홍범도 역시 김좌진 최진동 등의 부대와 함께 이동해 흑룡강 일대 자유시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 러시아군과 협조를 모색했습니다. 독립군 입장에서는 국제 정세를 활용해야 했고, 러시아 측과의 교섭은 생존과 재정비를 위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큰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른바 자유시참변으로 불리는 사건 속에서 독립군은 무장해제를 당했고 많은 단원이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지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상처였습니다. 같은 목적을 향해 움직일 것이라 믿었던 관계가 무너지고, 독립군의 조직이 한순간에 와해되는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 이후 홍범도는 1922년 무렵 고려중앙정청의 고등군인징모위원으로 임명되는 등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역할을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무장투쟁이 가진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국제 정세가 바뀌면 어제의 협력자가 오늘의 부담이 되었고, 독립군은 늘 강대국 사이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홍범도의 삶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 이유는, 그가 끝까지 독립운동가라는 정체성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투의 지휘관에서 조직의 책임자, 그리고 낯선 땅에서 살아남는 한 사람으로 변해가면서도 그는 자신의 역사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으로 홍범도는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되었습니다. 강제이주는 단순한 이사가 아니었습니다. 터전을 잃고 삶의 뿌리가 잘리는 경험이었고, 공동체가 흩어지는 비극이었습니다. 홍범도는 그곳에서 극장 수위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전해집니다. 봉오동과 청산리의 승리를 이끈 인물이 말년에는 조용한 노동으로 하루를 지켜야 했던 현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남깁니다. 역사는 영웅을 쉽게 부르지만, 영웅의 삶은 쉽게 보상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의 말년이 늘 존경과 안정으로 채워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추방과 가난, 잊힘 속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홍범도는 1943년에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뒤 국가의 서훈과 추모가 이어졌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21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가로 서훈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같은 해 광복절 무렵 카자흐스탄에서 유해가 봉환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사실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 사실이 주는 의미는 단지 한 사람을 예우했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해외로 흩어진 독립운동의 역사를 다시 국내의 기억 속으로 연결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큽니다.

홍범도의 삶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싸움이 끝나지 않는 시대에 끝까지 싸움의 형태를 바꿔가며 버틴 사람이었습니다. 의병으로 시작해 대한독립군을 창설하고 봉오동과 청산리의 승리에 참여했으며, 참변과 강제이주라는 비극 속에서도 살아남아 역사를 남겼습니다. 그의 이름은 단지 승리의 이름이 아니라, 잃어버린 삶을 안고도 포기하지 않은 시간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홍범도를 기억하는 일은 전투를 기억하는 것과 동시에, 그 전투 뒤에 이어진 긴 침묵의 세월까지 함께 기억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