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붕준은 임시정부에서 군무와 교민사회, 통일전선운동을 이끌며 광복 이후에도 통일 국가 수립에 힘쓴 인물이다. 전쟁 속 강제 연행과 비극적 최후까지 그의 궤적을 정리했다.

1. 신학문과 개척의 감각, 구국운동의 바탕이 되다
김붕준은 1888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이고 자는 군석이며 호는 당헌이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우며 자랐고, 기독교가 지역에 전래되던 흐름 속에서 신학문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용강은 제7안식일 계열 교회가 초기 거점을 마련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집안도 선교사의 전도로 입교한 배경이 전해진다. 종교는 단순한 신앙을 넘어, 시대를 읽는 새로운 문법이 되곤 했다. 나라가 무너지는 시간을 통과하던 청년에게 신학문과 신앙은 행동의 근거가 되었고, 공동체를 조직하는 언어가 되었으며, 무엇보다 타협하지 않는 윤리 감각이 되기도 했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보성중학교 농림과에서 공부했고, 서우학회 활동과 더불어 애국계몽운동 인사들과 교류했다. 이 무렵 비밀결사 신민회, 청년학우회 같은 흐름에도 참여하며 국권회복운동의 실천 지점을 찾았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일제는 안악사건, 신민회사건 등으로 애국계 인사를 대대적으로 탄압했고, 수백 명이 체포되고 실형을 받는 상황이 이어졌다. 김붕준은 이런 검거 선풍을 피하며 한편으로는 교육 활동에 협력하고, 한편으로는 농업과 수리, 관개, 간척 같은 분야에 뛰어들었다고 전해진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그는 단지 정치 구호를 외친 사람이 아니라, 땅과 물을 다루는 기술을 자신의 장기로 삼았다. 흥사단 이력서에 농림과 관개를 주요 역량으로 적었다는 기록이 전하는 바는 선명하다. 나라를 되찾는다는 말이 현실이 되려면 사람이 살아갈 기반이 필요하다는 감각, 개발과 개척이 애국과 연결된다는 감각이 그에게는 일찍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독립운동이 총과 선언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기술과 생활의 언어로 알고 있었던 셈이다.
2. 상하이 임시정부, 사람과 조직을 살리는 실무가였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났을 때 김붕준은 서울에서 참여했고,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임시정부가 통합을 이루는 과정에서 군무부 서기, 군무부 참사 등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또한 대한적십자회가 발기되고 설립될 때 선언과 결의에 참여한 인물로 이름을 올렸고, 이후 총회에서 상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구호와 의료 인력 양성 같은 실무에도 관여했다. 독립운동의 전장에는 늘 부상자와 병자가 있고, 그 뒤에는 반드시 의료와 구호가 있다. 총을 든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조직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어야 운동은 지속된다. 김붕준은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의 상하이 시기를 이해하려면 교민사회라는 기반을 함께 봐야 한다. 당시 상하이는 비교적 자유로운 정치 환경, 발달한 통신과 교통, 금융과 교육 여건 덕분에 한인들에게 생명줄 같은 도시였다. 임시정부의 기반은 문서와 회의만이 아니라, 교민의 일상과 안전, 교육과 복지에서 만들어졌다. 김붕준은 대한교민단 활동에도 깊이 관여하며 총무와 의사원으로 선출되어 교민 보호와 치안, 분쟁 해결, 행사 주관, 때로는 독립운동 관련 업무까지 폭넓게 수행했다.
가족이 상하이로 탈출해 합류하는 과정 또한 그가 몸담았던 임시정부 네트워크의 실체를 보여준다. 김마리아의 탈출을 돕는 작전 속에서 여러 가족이 동행했고, 인천에서 출발해 섬에 머물고 배를 갈아타며 긴 항해 끝에 중국에 도착하는 흐름이 이어졌다. 이 과정은 누구 한 사람의 용기만으로 성사되지 않는다. 숨을 곳을 마련하고, 변장을 준비하고, 경로를 조율하고, 병든 사람을 보호하며, 도착 이후의 거처까지 연결하는 조직의 힘이 필요하다. 김붕준은 이런 연결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는 국무원 비서장으로 임시헌법 개정에 참여했고, 독립신문 운영에도 경리로 참여하며 재정 마련을 위해 뛰었다. 통일전선운동, 유일당운동 같은 정치적 과제에도 관여했지만, 그 모든 정치의 밑바닥에는 늘 재정과 회계, 운영과 지속이라는 현실이 깔려 있었다. 여기에서 김붕준의 성격이 드러난다. 그는 앞에 서서 연설만 하는 인물이 아니라, 장부와 결산, 사람의 밥과 잠자리까지 책임지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떠받친 인물이다. 이런 사람은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다.
3. 통일을 위해 자기 자리를 내놓은 사람, 전쟁 속에서 사라지다
김붕준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통일이다. 그는 좌우익의 통합, 통일전선정부의 완성 같은 과제를 단지 이상으로 두지 않고, 실제로 성사시키려 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유일당운동이 결렬되고 세력이 흩어지는 과정에서도 통합의 끈을 놓지 않았고, 중국 남부 지역에서 청년을 교육기관에 연결하고 선전 활동을 돕는 등 기반을 확장했다. 광저우에서 한국독립당 지부를 결성하고, 많은 청년들이 황포군관학교와 대학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점은 전선의 미래를 준비한 행정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충칭 시기에는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되며 정치적 책임도 더해졌다. 그러나 그가 결정적으로 주목받는 장면은 통합을 위해 스스로 희생을 감수한 대목이다. 그는 의장 권한으로 조선민족혁명당 세력의 등원을 시도하며 통합의 불씨를 살리려 했다. 반발은 거셌고 결국 탄핵을 당해 의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여기서 그의 선택은 선명하다. 명분만 붙잡고 자리를 지키는 길이 아니라, 통합의 실현을 위해 자신이 비난을 감수하는 길을 택했다. 통일이라는 말은 모두가 외치지만, 그 비용을 실제로 지불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붕준은 그 비용을 감당한 쪽이었다.
광복이 다가오면서 임시정부는 좌우 통합의 국면으로 들어섰고, 임시헌장 제정과 함께 부주석 신설, 국무위원 증원 같은 제도 변화 속에서 통일전선정부의 형태가 강화된다. 김붕준은 국무위원에 선임되는 등 통합 정부의 한 축에 참여했다. 광복 이후에도 그는 흥사단 국내 조직 결성에 참여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 좌우합작 논의, 과도입법기구 참여 등 혼란한 해방 정국에서 통일 민족국가 수립을 향한 길을 계속 모색했다. 남북협상 흐름에도 관여하며 평화적 통일의 가능성을 붙잡으려 했다.
그리고 1950년 전쟁은 이 모든 꿈을 잔인하게 꺾었다. 서울 점령 이후 김붕준은 임정 요인들과 함께 강제 연행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북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공습을 받았고, 황해도 서흥 부근에서 소이탄에 피격된 차량에 탑승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날 이후 그의 사망 시점은 미상으로 남았지만, 전쟁 속에서 사실상 순국에 가까운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고, 독립된 나라에서 통일을 위해 다시 몸을 던졌지만, 전쟁은 그가 가장 바라던 목표를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무너뜨렸다.
그럼에도 그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1989년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가족 여러 명이 항일 독립투쟁 공로로 훈장을 받은 사실도 함께 전해진다. 서울현충원에는 위패로 모셔져 있다. 묘가 남아 있지 않아도, 그의 삶이 남긴 궤적은 분명하다. 독립운동을 조직으로 만들고, 생존을 기반으로 만들고, 통합을 제도로 만들려 했던 사람이다. 총을 든 영웅의 서사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게 버티는 실무의 서사다. 나라를 세우는 일은 거대한 선언보다, 끝까지 정리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그는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