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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나태섭, 왕중량으로 불린 광복군의 기초를 다진 사람

by 하루메모 2026. 1. 15.

 

독립운동가 나태섭은 이름보다도 왕중량이라는 활동명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나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를 지원했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군사 교육과 특무활동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사 기반을 강화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후 임시정부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어 한국광복군 창설의 기초를 다졌으며, 광복 이후에도 귀국과 정착 과정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을 남겼습니다. 이 글에서는 나태섭의 생애를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흐름과 역할 중심으로 정리합니다.

 

 

 

독립운동가 나태섭, 왕중량으로 불린 광복군의 기초를 다진 사람

 

 

 

1. 교육과 자금 모집으로 시작된 초기 독립운동의 길입니다

나태섭은 1901년 12월 16일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 중동학교를 1920년 3월에 졸업했으며, 재학 중 3월 1일 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됩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가 독립운동의 방향을 고민하게 만든 결정적 배경이 됩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봉삼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교육을 통한 구국 활동을 추진합니다. 봉삼학교는 천주교에서 설립 운영한 학교로, 문맹 퇴치와 교육을 통해 지역 사회의 역량을 키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태섭은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단순한 교사 역할을 넘어, 독립을 위해 필요한 힘은 결국 교육과 조직이라는 판단을 실천으로 옮깁니다.

이 시기 나태섭은 같은 지역 출신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에도 관여합니다.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는 일은 당시 독립운동의 생명줄과 같았습니다. 그는 안정근의 지시를 받고 최익형과 함께 고향 일대와 인근 지역을 오가며 자금을 모읍니다. 동시에 고시복, 김상직 등 동지를 규합하며 조직 기반을 넓힙니다.

그러나 자금 모집 활동은 곧 일제의 감시망에 걸립니다. 동지 최익형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나태섭은 검거 위험을 피해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그는 장사를 한다는 명분으로 집안 재산 일부를 정리해 원산으로 피신합니다. 이 선택은 도피가 아니라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이동이었습니다. 원산에서도 자금 모집과 임시정부 송금을 이어갔지만, 결국 정보망이 좁혀오면서 1927년 상해 망명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나태섭의 초기 활동이 화려한 무장투쟁이 아니라, 임시정부를 유지시키는 자금과 조직을 만드는 실무형 독립운동이었다는 점입니다. 많은 독립운동이 무장투쟁 중심으로 기억되지만, 그 바닥에는 이런 자금과 연결망이 존재했습니다. 나태섭은 그 기반을 담당했던 인물입니다.

 

 

2. 군관학교와 특무활동으로 무게중심이 군사로 이동합니다

1927년 상해로 망명한 뒤 나태섭의 활동은 점차 군사 영역으로 이동합니다. 그는 상해 도착 후 일정 기간 구체 기록이 선명하지 않지만, 임시정부 주변 단체들과 관계를 맺고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1934년 2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입학하면서 그의 삶은 분명한 전환점을 맞습니다.

한인특별반은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정부가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을 바꾸면서 만들어진 교육 과정입니다. 목표는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해 국내와 만주 등에서 활동할 기반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나태섭은 이 과정에서 본격적인 군사 훈련과 사상 교육을 받으며 조직적 투쟁의 틀을 배웁니다.

하지만 1934년 8월, 김구와 지청천 사이의 불화로 인해 김구 계열 인물들이 철수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나태섭도 이 흐름 속에서 한인특별반을 중도에 그만두고, 남경의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으로 입학해 중국식 정규 군사 교육을 이어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도 탈퇴가 좌절이 아니라, 이후 더 체계적인 군사 훈련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그는 재학 중 한국특무대독립군 결성에 참여하고 제1대장으로 선임됩니다. 이 조직은 김구의 정치활동을 뒷받침하는 성격이 강한 특무 조직이었고, 대일 정보 수집과 동지 보호, 선전 활동, 조직 유지 같은 보이지 않는 영역을 담당했습니다. 나태섭은 매주 본부를 드나들며 정신 교육과 자료 학습을 통해 항일 의지를 다지는 생활을 이어갑니다.

이 시기 나태섭은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으로도 선출됩니다. 다만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의정원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한 기간이 길었습니다. 대신 임시정부의 특별 임무를 수행하며 전투 지역 정보 수집과 공작원 모집 같은 실무를 맡았던 것으로 기록됩니다. 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정치 무대보다, 현장에서 움직이는 군사 실무와 정보 활동에 더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여기서 나태섭의 특징이 더 분명해집니다. 그는 단순한 전투원이 아니라, 임시정부가 군사 조직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인력과 연결망, 정보 기반을 실무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했습니다. 독립운동은 영웅 서사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조직을 운영하고, 사람을 움직이고, 정보를 모으는 일이 있어야 지속됩니다. 나태섭은 그 일을 담당한 인물입니다.

 

 

3. 군사위원과 특파단 활동으로 광복군 창설의 기반을 다집니다

1938년 7월, 나태섭은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선임됩니다. 군사위원회는 중일전쟁 이후 임시정부가 전시체제에 대응하고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만든 핵심 기구였습니다. 그는 남목청사건으로 사망한 현익철의 공백을 메우는 인물로 선택됩니다. 이는 단순한 인사 이동이 아니라, 임시정부가 군사 기반을 실제로 강화하려 했다는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39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군사특파원으로 선임되어 화북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합니다. 이후 군사특파단이라는 명칭으로 조직이 정비되며, 그는 서안에 사무실을 설치하고 선전과 초모활동, 거점 구축을 진행합니다. 이 활동은 결과적으로 한국광복군 창설을 위한 준비 작업이 됩니다. 광복군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필요한 것은 병력과 기반이었고, 이를 확보하는 과정이 바로 특파단의 역할이었습니다.

1940년 8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로 임명됩니다. 같은 해 11월 서안에 총사령부 판사처가 설치되며, 특파단은 해체되지만 나태섭을 비롯한 인원들은 광복군 간부로 활동을 이어갑니다. 이후 제2지대 편제 과정에서도 창설 간부로 참여하며, 모병과 선전이라는 핵심 임무를 수행합니다. 수원성 포두를 거점으로 북평, 천진, 당산, 장가구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은 그의 업무가 단순한 행정 지원이 아니라 실제 군사 조직 확장을 위한 움직임이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활동 과정에서 초모한 청년 중 한 명이 일본군에 투항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고, 동지가 체포되는 사건도 겪습니다. 이 대목은 독립운동이 늘 승리와 성과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실패와 위험 속에서도 조직을 유지하고 방향을 잡는 일이 더 어려웠습니다. 나태섭의 활동은 바로 그 불안정한 현실을 견디며 기반을 다지는 일이었습니다.

1942년 말 그는 군무부 부원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고, 1943년에는 군무부 총무과 과장으로 임명됩니다. 1944년에는 군사학편찬위원회 간사로 임명되어 군사 서적 편술과 군사법규 기초 같은 업무에도 관여합니다. 전투만이 아니라 제도와 규범을 만드는 작업까지 수행한 셈입니다.

광복 이후에도 그는 곧바로 환국하지 못하고, 중국 내 교포들의 안전한 귀국과 재산 보호 등 잔무 처리를 위한 대표단 활동에 참여합니다. 1946년 5월 환국한 뒤에는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국군으로 복무합니다. 1989년 5월 서거하였으며,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습니다.

나태섭의 생애는 무장투쟁의 한 장면으로만 요약하기 어렵습니다. 자금 모집, 교육 활동, 군관학교 수학, 특무활동, 군사위원회 활동, 특파단 활동, 광복군 기반 확장, 그리고 광복 이후의 정리까지 한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이 흐름을 이해하면 독립운동이 얼마나 다양한 영역의 실무로 유지되었는지 보이게 됩니다. 나태섭은 바로 그 실무와 기반을 담당했던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