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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옥, 총을 들고 시대에 맞선 조선의 실천가

by 하루메모 2026. 1. 11.

독립운동가 최양옥은 대동단과 대한독립공명단에서 군자금을 모으고 1929년 양주 마치고개 송금차량 탈취 의거를 실행한 인물이다. 감옥과 망명, 해방 후 삶까지 그의 선택을 한 편의 기록으로 정리했다.

 

 

 

최양옥, 총을 들고 시대에 맞선 조선의 실천가

 

 

 

 

1. 조용한 양반의 아들이 왜 총을 들었는가

최양옥은 1893년 강원도 횡성에서 양반 가문 장자로 태어났다. 법부 주사를 지낸 부친과 비교적 넉넉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며, 어릴 적부터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15세에 혼인까지 하며 안정적인 삶의 경로 위에 있었다. 그의 인생은 겉으로 보면 조선 후기 지식인 가문의 전형적인 궤도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조선의 군대가 해산되며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본 소년 최양옥의 내면은 급격히 변했다. 나라가 사라지는 장면을 눈으로 목격한 경험은 이후 그의 모든 선택을 규정했다.

그는 원주보통학교와 서울 중동중학교에 다녔고, 생계를 위해 측량업과 장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업은 잘되지 않았고, 그는 점점 자신의 삶이 가난해지는 이유가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긴 구조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 있던 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돌아온 신덕영을 만나면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는다. 그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독립을 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후 횡성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도 직접 참여했다. 그때부터 그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조직적인 독립운동에 자신의 삶을 걸기로 결심한 사람이 되었다.

최양옥의 선택은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계산된 결단이었다. 가족과 재산, 사회적 지위를 포기하고 불법 조직원이 되는 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안전한 삶보다 위험한 정의를 택했다. 이 선택 하나가 이후 그의 전 생애를 지배했다.

 

 

2. 돈 없는 독립운동이 얼마나 잔인한지

독립운동은 총보다 돈이 먼저 필요했다. 무기를 사고, 조직을 유지하고,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수였다. 최양옥이 참여한 대동단과 대한독립공명단은 이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920년 그는 신덕영과 함께 전라도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는다. 겉으로는 주식 모집원으로 위장했지만 실상은 독립운동 자금을 걷는 일이었다. 그는 곡성과 담양, 화순 일대를 돌아다니며 부유한 집을 찾아다녔고, 때로는 장난감 권총까지 사용해 협박하며 돈을 요구했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강도에 가까운 행동이지만,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이것을 전쟁 자금 조달로 인식했다.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조선의 부유층이 마땅히 부담해야 할 비용이라는 논리였다.

그는 이 일로 1921년 징역 7년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 수감된다. 독립운동가로서의 첫 대가였다.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고, 그 안에서 그의 몸과 건강은 급격히 무너졌다.

하지만 출옥 후 그는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한다. 이 조직은 단순한 의열투쟁이 아니라 군대를 키워 일본과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장기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다시 돈이었다. 중국 군벌이나 외국 세력의 지원은 기대만큼 오지 않았고, 결국 다시 선택지는 하나로 좁혀졌다. 직접 탈취하는 것.

그 결과가 1929년 4월 18일, 양주 마치고개에서 벌어진 조선총독부 우편 송금차량 탈취 사건이다. 이 작전은 매우 치밀했다. 위치 선정, 역할 분담, 도주 계획까지 모두 구체적으로 준비되었다. 최양옥은 운전사를 제압하고 차량을 장악하는 핵심 역할을 맡았다.

결과적으로 차량에는 기대했던 현금이 없었고, 작전은 재정적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일본 당국에 큰 충격을 주었고, 대한독립공명단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그는 다시 체포되어 이번에는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그의 인생에서 자유로운 시간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3. 감옥을 나와도 끝나지 않은 싸움

1939년 만기 출옥했을 때 최양옥은 이미 중년이었고, 몸은 병들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총을 들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그의 삶이 평온해진 것은 아니었다.

1946년 그는 서울형무소 서무과장과 인천형무소장을 지내며 해방된 나라의 교정 행정을 맡았지만, 정치적 갈등과 내부 문제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예와는 달리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삶을 살았다.

1962년이 되어서야 그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는다. 국가가 그의 희생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에게 훈장은 부를 가져다주지 못했고, 젊음을 돌려주지도 못했다.

그는 말년까지 동지들의 묘소를 찾아다니고 기념사업에 참석하며 자신들이 시작했던 싸움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려 애썼다. 그리고 죽어서도 국립묘지가 아니라 아버지 곁에 묻히기를 원했다. 개인으로서의 삶과 가족을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양옥의 삶은 영웅담으로만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돈이 없으면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조직과 전략이 없으면 독립은 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가장 위험하고 더러운 일까지 떠맡았다.

그가 진짜로 위대한 이유는 총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총이 가져올 모든 대가를 알고도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은 성공한 혁명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끝까지 책임진 실패한 실천가의 기록에 가깝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나라를 가진 개인으로 살고 있다.